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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내속의 낮익은 나를 찾아서

 

내 속의 타인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 길은 고향의 돌담길 같은 골목길이다. 그 길에서 나는 많은 낮 익은 타인을 만난다. 어린아이도 만나고 청년들과 육이오때 본 흑인병사들도 만나고 할배들과 할머니들도 만난다. 그러나 그 길에서는 내가 제일 만나고 싶은 분은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초록물결이 일렁이는 한들을 지나 넒은 강을 건너간 다음 후삼국의 전설이 줄줄이 역인 높은 산을 넘어 십승지지를 닮은 고즈넉한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집성촌 재실 대청마루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실 그분을 만나고 싶다. 그분은 개화기에 태어나 시인이 되고자 한양으로 도망갔으나 종손이라서 붙잡혀 와 일생을 신라의 중악 팔공산 정상을 바라보시면서 산골마을을 지키시다 귀천해도 이 산골을 떠나지 못하셨다.

 

그분은 숨어계신 시인으로 일생을 두고 한 두 편의 한시만 숨기듯 남기시고 휘호를 즐기셨으나 작품에 구지 낙관을 찍지 아니하시고 다만, 柏下란 호만 적어놓으셨으나 돌아가신 후 후손들이 작품을 애써 찾아도 없음은 아마도 자기를 너무 낮추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평광은 단양 우씨가 난리를 피해 내려와 팔공산 깊숙이 숨어있는 넒은 동리 坪廣으로 흔히 줄여서 廣里라고 불렀다. 그분은 현대시를 쓰고자 친구 이상화시인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지만 종내 서울행을 포기하고 산골에 남아 문중대소사를 치루는 종손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다.

 

아마도 사십대에 상처하여 새장가를 아니 가실 수 없게 되시자 과년한 첫딸을 서둘러 시집을 보내느라고 당시에 시행된 정신대에 안 보내려고 일찍 시집보낸다는 핑계를 대어 열일곱에 시집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신랑 될 사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만 어머니 50년 시집살이를 어렵게 했다. 팔공산 아래 제일 미녀로 알려진 선녀 같은 우리 어머니를 얻은 우리아버지는 너무 버거워선지 아니면 미숙해선지 그만 우리어머니를 벙어리로 살아가게 하셨다. 산골이라 학교가 멀어 아예 삼 십리길 대구에 집을 장만하여 두 남동생들과 함께 소학교를 유학하셨다. 내 고향 경산은 비산비야의 땅으로 대구근교의 교통이 좋은 곳이다. 특히 일제가 놓은 경부선이 지나는 곳이라 대도시주변의 잡류가 흐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미풍양속은 사라지고 현실적인 이기의 땅이었다. 그 시절 우리 어머니를 태우고 골짜기를 넘고 강을 건너온 꽃가마가 재실 뒤 곁을 지키다가 70년대 경북대학에서 졸업식 행사로 쓰고자 사방을 찾다 겨우 이 꽃가마를 빌려 행사를 치룬 것이 지방신문에 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조와 현대가 만나 많은 충돌이 생겼다. 그 하나의 예로 큰 집에 엄마 보다 몇 살 위의 식모가 한사람 있었는데 새댁이 그만 말을 탁 놓아버려 큰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는 그녀를 종으로 알았고 우리집안에서는 식모로 대우한 차이였다.

 

산골 양반 종가의 장녀로 자란 엄마가 이미 도시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읍내의 풍속은 많이 달랐든 모양이다. 외조부님은 문중을 돌보시기 위해 병원은커녕 약방도 멀리 동촌까지 나가야 있는 벽촌이라서 동리 일가를 위해 한의학을 자습하여 간단한 치료와 처방을 하시어서 외가에 가면 약용으로 쓰는 밤을 먹기도 한 기억이 새롭다.

 

나는 친할아버지가 없고 외할머니가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기억은 외할아버지가 전부다. 나는 내속에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할아버님은 과묵하시여 별로 말씀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이 내게 보내는 사랑은 느낌으로 충만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친 할머니를 부터는 가없는 사랑 절대적이며 때론 종교적인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할머님은 그의 염불처럼 우리 호이, 우리 호이를 입에 달고 사셨다.

 

할머님은 작고하시기 전에 내게 유언을 남기셨다. 그 것은 일생 마음속 깊이 동아리 튼 한 곧 엄마를 잃고 새엄마의 박대 속에 어렵게 소녀시절을 보내셨다. 그러다 퇴락한 양반이 지체가 좀 못하고 재취자리지만 그래도 선비집안이고 먹고사는 것이 다소 유복한 곳이라 하여 건너 마을로 시집을 오셨다. 그러나 박복한 운명은 남매를 낳고 난 얼마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동생이 집안을 맡아 그나마 조금 남은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한다. 다행히 아버지가 그래도 하급 관리라 먹고사는 것은 부족하나마 지날 만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 덜렁 일을 치러 노구를 이끌고 큰집에가 식모살이를 하시다시피 사셨다. 그나마 정붙이고 살만한 딸이 어려서 죽고 난 후 오로지 한 아들이 그만 말썽만 피워 정말 죽고 싶은 심정으로 몇 번씩 집안 우물에 뛰어드시기도 하셨다. 그분의 가장 큰 한은 엄동설한에 불기 없는 부엌에서 울면서 배고픔을 달래든 설음이었다. 또 가장 큰 소망은 이웃에 교회가 생겨 나가고 싶어도 청상과부라 남의 말이 무서워 가질 못해 포교당에 마음을 받쳐도 영혼의 갈증을 풀지 못해 교회를 나가 신식종교를 만나지 못한 것을 미련으로 남기셨다.

 

각설하고 문예에 남다른 관심과 소양을 갖추신 외조부님이 내 속에 살아계신다면 그분은 어떤 내용을 글로 표하고 싶어 하실까 ? 시를 쓰신다면 어떤 내용을 주로 하실까 그분은 불교를 믿었으니 기탄잘리 같은 유의 묵상시를 좋아하셨을까 아니면 산중에 사셨기에 자연을 노래하시고 싶어 하셨을까 아니면 친구처럼 조국을 안타까이 부르는 심미주의로 흘렀을까 ?

 

내가 지금 그분을 만나고 싶은 것은 내 속에 살아계신 그분을 통해 우리 어머님을 위로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여 그분을 위해 아버지를 희랍신화속의 왕자처럼 아버지를 증오하고 살았다. 어머님의 한은 시절을 잘못만나 자기의 소질과 꿈을 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셨으며 그분 역시 우리가 자유로이 믿는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어 하셨다. 참 그리고 보니 우리 엄마는 참으로 마리아와 많이도 닮았다. 후리후리한 큰 키에 이국적인 미모 그기다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가 무척 아름답고 빛나시든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마리아를 많이도 닮았다. 더욱이 아버지가 나 때문이지 아니면 누나 때부터 인지 엄마방에 태교용으로 당시에는 귀한 그림인 잡지에 나온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 곧 성모자상 그림을 액자에 담아 걸어두셨다. 내 생애 처음이자 가장 강한 이미지가 바로 이 그림 한 장으로 나는 그림 속의 아기를 나로 마리아를 엄마로 알고 그렇게 현재의식만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까지 각인하였다. 그렇다 나는 예수요 엄마는 마리아다. 나는 마리아를 위하여 어떤 아베마리아를 노래해야만 하나 그것이 나의 숙제다.

나는 마리아를 위하여 어떤 아베마리아를 노래해야만 하나 그것이 나의 숙제다. 그러니까 내 속에 잠재해 있는 낯익은 나는 외할아버지요 그리고 엄마다. 그분들이 살아생전에 부르시지 못한 시와 노래를 그리고 그림을 내가 그려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다. 내가 엄마의 심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기리고 할머님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외조부의 정감으로 하늘나라를 그려보자.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 속에 숨어있는 수많은 낯익은 타인들이 나인가 ? 아니면 그 모든 사람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가고 있나 ? 어느 때 부터인가 나는 공부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공책이나 교과서의 여백에 낙서하기를 즐겼다. 그 그림들은 주로 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장면과 말 그리기를 자주했다. 나는 그림이 좋았다. 그러나 본인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나이가 들쑥날쑥하여 많은 친구는 대여섯 살이 많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학생이라 맨앞 줄에 앉았으며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비교적 수업시간에 나 혼자의 상상의 세계나 아니면 낙서를 즐겼다. 그러니까 내가 이미 이미지에 익숙한 아이라서 그림을 좋아하다 보니 만화를 특히 좋아했다. 내가 처음 만화를 접한 것은 아마도 1946년쯤이 아닐까 한다. 내 나이가 만으로 다섯 살 때 해방 후 처음 우리만화가 나온 시기에 마침 집 앞 친척할아버지가 심심파적으로 연 문방구를 겸한 책방으로 놀러갔다가 첨본 만화에 반해 그만 죄의식 없이 만화책 한 권을 가져다 몰래 숨겨놓고 보았다. 그러니까 여섯 살짜리가 책 도둑질을 한 것이다. 그만치 나는 만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별로 읽을꺼리가 없다 보니 신문이나 잡지나 무슨 책이든 가리지 않고 들어다 보기를 좋아했다.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엄마의 태중에서부터 보아온 성모자상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제 70세를 맞아 우연히 참여하게 된 과천노인복지관 문창반에서 본격적으로 파스텔화를 그리기 전에도 그림 배우기를 두어 차례 시도하였다. 처음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노인복지관에서 서양화반이 생겨 참여하여 수채화를 배웠으며 다음으로는 국립미술관에서 시행한 한국화반에 잠간 묵화를 배운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수첩같은 화첩을 만들어 그때그때 그림그리기를 자주한다. 시서화가 삼절로 하나라고 보는 것이 동양의 사고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시는 그림이요 노래가 되어야 한다. 나의 시가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놀라운 세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을 그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탄잘리가 아닌가 ! 그리고 시가는 원래 하나이니 구지 구분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것은 외조부와 정신세계와 엄마의 정감 그리고 할머님의 간구가 들어 있는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고 호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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